80년대를 지나며 한국만화계에
남은 가장 큰 문제는 주목할 만한 신인작가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웬만한 그림실력을 가진 신인들은 고생하며 자신의
작품을 창작하기보다는 유명작가의 그림을 대신 그리면서
경제적인 여유를 누리는 길을 택했다. 나중에 자신의 그림을
그리려해도 이미 유명작가의 그림체가 몸에 배여 자신의
그림을 그릴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90년대 한국만화의 새로운 돌파구는
만화잡지에서 시작됐다. 89년 창간된 주간만화잡지 <아이큐점프>와
91년 창간된 <소년챔프>는 신인작가의 발굴에 적극
나섰다. 비슷한 그림을 양산하던 기성작가들의 만화로는
만화잡지의 주독자층인 청소년들의 호응을 얻을 수 없게된
탓이다. 신인발굴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각 만화잡지들의
'신인공모제도'였다. 나이나 성별, 경력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신인공모에 입상하면 작가가 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수많은 신인작가가 탄생했다. 신인공모에
응모하고, 당선된 작가들은 기성작가의 문하생이나 만화공장에서
활동하던 기존 작가들과는 달리 자신만의 만화를 그리고
싶어하는 신세대 만화가들이었다.
고교생 작가 이명진의 등장은 신인공모제도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 신인공모 당선 당시 이명진의
그림은 누가 보아도 미숙해 보이는 점이 많았다. 그러나
독특한 스토리 진행과 개성 넘치는 그림, CF를 보는 듯한
빠른 이야기 전개는 청소년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매주
10여페이지 정도의 연재를 몇 해 동안 계속하면서 이명진의
그림체는 80년대의 그 어느 작가와도 차별되는 독특한 것이
되었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고교생 남궁건과 민승아의 연애
이야기와 그 친구들이 학교를 무대로 벌이는 에피소드로
만들어진 <어쩐지...저녁>의 완결 이후 이명진은
군복무를 했다. 그가 군대에 가 있는 사이에도 그의 열혈독자들은
그의 복귀를 손꼽아 기다렸고, 3년이 지난 후 98년부터
<소년챔프>에 북유럽의 신화를 기본으로 신과 인간,
마족, 거인족간의 전쟁과 사랑을 스펙터클하게 그린 <라그나로크>를
연재 중이다. 현재 단행본으로 4권까지 발매된 <라그나로크>는
90년대 후반 부각되고 있는 새로운 장르인 판타지를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수작으로 꼽힌다. 이명진 이후 <검정고무신>의
이우영, <먹통X>의 고병규, <프리스트>의 형민우,
<8용신전설>의 박성우, <누들누드>의 양영순,
<선녀강림>의 유현, <오디션>의 천계영 등이
신인공모를 통해 데뷔했고, 이들은 90년대 한국만화계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이제 새로 창간하는 만화잡지는 신인공모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가진 신인작가를 발굴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새로운 만화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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